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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자퇴녀 사건의 촛점은 대학이 아닌 "자본주의" (과거글)

by 모더니아 2014.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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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자퇴녀 사건

 

얼마 전 우리나라 엘리트 대학 고대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일어나 많은 네티즌의 공감 또는 반발을 일으키고 있다. 고려대 경영대에 재학중이던 여학생이 과감히 대학을 자퇴, 또는 "거부"하면서 대자보에 게제한 글이 화제가 되어 많은 네티즌들의 토론을 활성화 시키고 있다.

 

 

출처: 오마이뉴스

 

 

밑에 전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생각이 많이 들어간 글이며 단순히 "경쟁"에서 도태되는 이의 가벼운 글로 치부하기엔 상당히 무겁고 수준이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겠지만 적어도 애써 무시하려는 듯한 거대 신문사 몇을 빼고는 상당히 많은 언론 매체들이 자신들의 색을 적당히 섞던 사실만을 보도하건 보도가 많이 되고 있고 요즘같이 왠만한 큰일 아니면 무시할 정도로 바쁜 시대에 많은 네티즌, 혹은 시민들의 상당한 공감, 또는 반감을 표출시키게 했다는 것에서 가벼운 글은 아니란 점은 증명되었다고 본다.

 

우선 전문을 아직 못봤다면 밑의 전문을 참고.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25년 동안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 해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 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 질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는 의무 교육의 이름으로 대학의 하청 업체가 되고,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에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하청 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이 변화 빠른 시대에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도 큰 물음도 없는 '대학(大學)'없는 대학에서, 우리들 20대는 투자 대비 수익이 나오지 않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제 손으로 자기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이대로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우리 젊음이 서글프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리고 대학에서 답을 찾으라는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 체제를 떠받쳐 온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 생각한 대로 말하고, 말한 대로 행동하고, 행동한 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덕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지만 균열은 시작되었다. 동시에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이제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에 두고 나는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는 두고 볼 일이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현재 사람들의 반응

 

현재 네티즌들은 김예슬 씨에게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는 의견과 "목표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는 타 학생들까지 폄하됐다" 등의 찬반으로 갈라져 있다.

 

또한 한발짝 더 나가서 김예슬씨를 운동권, 미래 정치인이 되기 위한 쇼를 하는 사람으로 단정짓거나 다시 학교를 찾아 자퇴를 번복하는듯한 행동을 했다는 증언 등을 쏟아내는 네티즌도 많은 상황이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진위를 떠나서 많은 사람들에게 와닿거나 그정도의 거부감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이 글이 주는 영향력이 드러나며 동의하는 듯한 매체나 사람들은 글에서 드러나는 '대학'의 의미에 많은 촛점을 두고 있는 듯하다.

 

 

 

이 사건의 촛점

 

하지만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김씨가 주장하는 문제점은 "大學"만이 아닌 사회 전반적인 모순, 혹은 구조이다.

 

김씨의 주장이 맞냐 아니냐를 떠나서 그의 주장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짚어야 하는 이유는 이 주장이 많은 젊은이에게 어떤 "움직임"을 줄 수 있어서 그들의 "용기"있는 행동이 뒤따를 가능성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개인적으로는 김씨의 주장에 대단히 공감하며 그런 변화가 뒤따른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함)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그 변화의 방향이 올바를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젊은이들이 느끼는 억울함, 무력감, 현실에 대한 불안함 등의 원인은 대학을 변화시킨다고 변화하는 것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혹시 이 글을 누군가가 심각하게 읽고 있다면 잠시 개인의 정치적 성향 등을 잠시만 내려두고 읽기를 바란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문제로 삼고 있는 "대학의 하청화"에 대해 좀 주장해 보려고 한다.

 

 

 

전세계적 대학 번영의 배경

 

대학이 언제부터 "대중적"으로 폭발적으로 번영하고 인기가 높아져 거의 전세계가 대학 없는 곳이 없게 되었는지 알고 있는가?

 

대학은 물론 모든 사람의 '바램'처럼 처음에는 '교육'에 촛점을 둔 기관이었으나 급격한 인기 및 번영의 계기에는 산업혁명이 있었다.

 

김씨의 정확한 지적처럼 대학은 하청화 되었고 그것을 부정하기엔 산업혁명의 역할이 너무 크다.

 

18세기 말 즈음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나며 농사꾼들이 주류가 아닌 '기업'에 필요한 인재 및 공장 인력이 필요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변화로 인해 사람들은 공장 및 기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기업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인력을 직접 교육과 활용을 병행하며 운영해야 했고 "효율"이 생명인 산업화에서 기업은 자신들에게 활용될 준비가 되어있는 인재를 원하기 시작했다.

 

대학은 정말 완벽한 기업의 파트너였다. 대학에서 공부한 인재들은 비교적 조금의 노력만으로 활용 가능한 고급 인재였으며 이 조그만 차이가 많은 부의 차이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점점 대학 교육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기업과 대학은 일종의 "분담"을 통해 "효율적"인 협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기업은 적극적으로 대학에 잠재적 인력의 교육을 분담시키며 많은 지원을 하게 된 배경이다. 당연히 대학도 기업에 좀 더 최적화 시키는 교육을 추구하게 되었다. (대학은 원래 오래전부터 "일꾼"을 만드는 기관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기업에 취직을 원해서 대학을 가서 교육을 받고 자신들이 원하던 취직을 하게 되고 대학은 기업의 지원으로 더 많은 연구 및 확장을 할 수 있게 되고 기업은 준비된 인재를 "납품"받아 즉각 활용 가능하고...  모두가 이기는 상황이 아닌가?

 

여기서 촛점은 대학이 아닌 "자본주의"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어떠한 특정 정치적이거나 이념적인 주장이 아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배경

 

유럽의 귀족 사회에서 땅의 소유권을 가진 귀족들은 소작농을 이용해 안정적인 부를 누리며 살고 있었다.

 

조금씩 지적 수준이 높아진 중간 계층이랄까 부르주아(지적 수준이 높은 의사나 학자 등)들은 똑똑한 것은 자신들인데 귀족들이 모든것을 누리는데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고 농부들도 앉아서 자신들이 지은 농사로 놀고먹는 귀족이 불만이었다.

 

다른 이유로 서로 힘을 합쳐 계급혁명을 이룬 후 산업혁명과 함께 새로운 삶을 꿈꾸게 되지만 애초에 농부와 부르주아는 지식 수준이 달랐고 똑똑한 중산층이었던 부르주아는 "생산의 도구"인 공장이나 기업 등을 소유하게 되면서 새로운 실질적 "귀족"이 되어 갔고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 칼 막스의 막시즘 등이었고 자본주의에 대한 염증에 대한 반발로 유럽은 한차례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휘몰아 치고 지나가 현재 "자본주의"를 동반한 민주주의가 전 세계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서 다시 자본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시작되게 된다.

 

막시즘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면 나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을까봐 그냥 자본주의 + 민주주의가 이기고 끝났고 그 이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세트처럼 자본주의 = 민주주의로 정의되듯이 정착되었으며 전세계인의 공산주의에 대한 지독한 반감을 이용해 자본주의를 주장하는게 민주주의를 인정하는 것처럼 굳어지게 되었다고만 쓴다.

 

특히 우리나라는 미국에서 민주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더욱이 자본주의를 맹신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현재 미국이 겪고 있는 자본제일 민주주의의 부작용을 똑같이 하나씩 겪고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의 부작용

 

자본주의가 무조건 악이다, 나쁘다고만 주장하는것처럼 보일까봐 걱정이다.

 

우리는 자본에 의해 받는 혜택이 엄청나게 큰 힘을 갖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예를들어 우리가 현대자동차같은 회사가 없었다면 80~90년대에 싼값에(현재는 아니지만) 자가용이나 영업용 화물트럭을 이용할 수 없고 외국제 비싼 차를 외화 낭비해가며 사용해야 했을 것이고 기업이 일자리를 제공해 주며 상호적으로 좋은 영향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자본의 거대함이 어떤 특정 기득권자들의 이익만을 바라보게 될 때 사회는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목표는 주주의 이익을 최대화 하는것이 제 1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공익의 가치는 실현되기가 어렵게 되었고 사정이 어려우면 비용 절감을 위해 과감히 "불필요한" 일자리를 제거하여 최대한 이익을 짜내어 주주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며 "시장"으로 대변될 수 있었던 "국민" 혹은 "서민"이 자신들이 고객이 되기 힘들 정도로 소득수준이 양극화 되어도 상관없게 되었다.

 

글로벌화와 함께 기업은 국적의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안팔리면 더 큰 시장인 미국이나 유럽에서 더 많이 팔면 된다.

 

이건 여담이지만 그래서 난 어떤 기업이 외국 제품이 국내에서 자신의 시장을 빼앗을때면 애국심 마케팅을 하는 것이 혐오스럽다.

 

더구나 지금 취업 세대들은 인구가 점점 높아져 정점을 찍을때 쯤의 세대들이다.

 

특히 인구가 많은 세대가 일자리마저 없을수 밖에 없는 상황의 시대에 태어났으니 경쟁이 엄청난 것은 당연하며 이 경쟁이 기업에게는 비용도 안들이고 고급 인재를 얻을 기회이니 더 부추기지 않을 이유도 없다.

 

 

 

 

희망없는 현재

 

산업 혁명까지 올라가서 이유를 찾아내 보았으나 답은 보이지 않는다.

 

정당한 이유를 들어 자본주의를 비판해 봤자 혹 민주주의를 거부라도 한 마냥 비난 받으며 빨갱이 취급을 받는 상황이니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이게 현 젊은이들이 죽을 맛이면서도 마라톤 여정에서 100미터 달리기처럼 바로 발 앞의 트랙만 전력질주를 할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다른 길은 없이 낭떠러지 위에 일자의 마라톤 코스만 있다.

 

19~20세기에는 이런 빈부 양극화에 대한 반감이 이념과 결합되 전세계가 한번 뒤집혀지기라도 했지만 이번엔 한쪽이 다 죽기 전엔 안 뒤집힐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아직도 좌우, 보수 진보, 빨갱이 등의 마케팅으로 계속 변화에 발목이 잡히며 사회는 변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기업과 정치인은 결합해 자본주의를 보완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처럼 일종의 쇼를 하고 있고 국민은 포기하고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달린다.

 

국민이 한명 한명이 의식이 바뀌어 마음을 먹어 용기를 내거나 국가적으로 큰 결정에 의해 "자본주의를 위한 민주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를 위한 자본주의"로 가기 위한 큰 변화가 있기 전엔 장기간의 어두운 미래가 보인다.

 

고대 자퇴녀가 겁쟁이가 아니고 용기있는 젊은이로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 공감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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